고려의 위기를 넘어서: 홍건적의 침입과 공민왕의 선택
서론: 14세기 동북아시아, 격변의 시대
14세기 중반, 동북아시아는 거대한 격변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을 호령하던 원나라 제국이 쇠락의 길을 걸으며, 각지에서는 반란과 봉기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중에서도 붉은 두건을 쓴 한족 농민 반란군, 즉 홍건적의 등장은 원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을 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진 고려에게도 예측 불가능한 위협으로 다가왔습니다.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해 공민왕의 개혁 정치가 한창이던 시기, 이웃 나라의 내전이 자신들에게 닥칠 엄청난 시련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홍건적은 두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했고, 특히 2차 침입 때에는 수도인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이 안동까지 피난을 떠나는 등 고려 역사상 전례 없는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 글에서는 중국의 혼란 속에서 태동한 홍건적의 발흥부터, 고려가 겪었던 두 차례의 침입과 그 처절한 항쟁의 역사를 상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특히 2차 침입의 비극적인 전개와 그 속에서 빛났던 고려인들의 저항 정신, 그리고 이 전쟁이 고려 사회에 남긴 깊은 상처와 역사적 의미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루겠습니다.

1. 홍건적의 발흥과 고려 침입의 배경: 대륙의 혼란이 불러온 나비효과
원나라의 쇠퇴와 홍건적의 등장
14세기 중반, 원나라는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오랜 평화와 번영 뒤에는 귀족과 환관들의 부패가 만연했고, 무분별한 토지 수탈과 가혹한 세금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습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황하가 범람하고 역병이 돌아 수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는 등 천재지변까지 겹쳤습니다.
절망에 빠진 한족 농민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특히 흰 연꽃을 상징으로 삼는 백련교를 중심으로 한 반원(反元) 운동이 확산되었고, 이들은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둘러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냈습니다. 이것이 바로 홍건적입니다. 초기 홍건적은 단순히 원나라에 대항하는 농민 반란군이었지만, 세력을 급속도로 불리며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북경)까지 위협하는 강력한 군사 집단으로 성장했습니다.
왜 고려를 침입했는가?
대륙의 패권을 두고 원나라와 홍건적이 격렬한 전투를 벌이던 중, 홍건적은 원나라의 대대적인 반격에 부딪혀 세력이 약화되었습니다. 이때 일부 홍건적 세력은 퇴로가 막히자 방향을 틀어 동쪽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들의 눈에 들어온 곳이 바로 압록강 너머의 고려였습니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을 받던 속국이었으며, 이는 홍건적에게 침략의 명분을 주었습니다. 또한, 몽골군에게 쫓기는 절박한 상황에서 군량과 물자를 확보하고,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한 안식처가 절실했습니다. 이들은 고려를 손쉬운 먹잇감으로 여기고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침입을 감행하게 됩니다. 이는 중국 내전의 여파가 고려에 직접적으로 미친 역사적인 나비효과였습니다.
2. 1차 침입 (1359년): 변방의 위협을 넘어
1359년 11월, 홍건적의 선봉 부대인 모거경이 이끄는 약 4만 명의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 고려의 국경을 침범했습니다. 고려 조정은 즉시 이들을 막기 위해 나섰지만, 방어에 실패하며 서북면의 여러 성들이 함락되었습니다. 홍건적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당시 서경(평양)까지 점령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고려 조정은 홍건적의 침입에 크게 당황했지만, 즉시 안우와 이방실 등을 중심으로 대규모 군사를 동원해 반격에 나섰습니다. 고려군의 맹렬한 공격에 홍건적은 큰 피해를 입었고, 결국 이듬해인 1360년 1월에 대부분의 병력이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철수했습니다.
1차 침입은 비록 고려가 홍건적을 물리치기는 했지만, 국경 지역의 방어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는 이후 홍건적의 2차 침입을 막지 못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3. 2차 침입 (1361년): 고려 왕조의 존망을 건 위기
1차 침입으로부터 불과 2년 뒤인 1361년, 홍건적은 중국에서 다시 세력이 커지자 모거경과 반성(潘誠) 등 10여 명의 장군이 이끄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압록강을 넘어 고려를 침략했습니다. 이때 고려는 1차 침입의 교훈을 잊고 방어에 소홀했던 탓에, 홍건적의 침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홍건적은 빠른 속도로 남하하며 12월 19일, 마침내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함락하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켰습니다. 고려 역사상 외적의 침입으로 수도가 함락된 것은 몽골 침입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홍건적은 개경을 점령하고 무자비하게 궁궐과 관청, 민가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수도는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수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거나 홍건적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개경이 함락되자, 공민왕은 왕비와 대신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몽진(蒙塵)을 떠나야 했습니다. 임시 수도는 복주(안동)로 정해졌고, 공민왕은 그곳에서 피난 생활을 하며 수치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고려의 왕실은 국토의 중심을 잃고 뿔뿔이 흩어졌으며, 왕권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고려는 이대로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개경 함락 소식에 전국 각지의 군사들이 봉기했고, 공민왕은 피난지에서 각 지역의 군사력을 총동원하여 개경 탈환을 명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총사령관 정세운을 중심으로 안우, 이방실, 최영, 이성계 등 당대 최고의 장수들이 연합군을 구성했습니다. 특히 이성계는 압도적인 기병 전술로 홍건적을 격파하며, 이후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이듬해인 1362년, 고려군은 홍건적에게 포위된 개경을 향해 총공격을 감행했습니다. 홍건적은 개경을 지키려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고려군의 협공과 사기 저하로 인해 결국 패퇴했습니다. 고려군은 개경을 되찾았고, 홍건적은 황급히 압록강을 건너 북쪽으로 달아났습니다.
4. 전쟁의 승패와 나의 생각: 절망 속에서 피어난 새로운 희망
고려-홍건적 전쟁의 결말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의심할 여지 없는 고려의 승리였습니다. 왕조의 수도가 외적에게 함락되는 치욕을 겪었지만, 고려는 불과 몇 달 만에 수도를 되찾고 홍건적을 국토 밖으로 몰아냈습니다. 이는 고려의 군사적 역량이 여전히 강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 전쟁을 단순한 승리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쟁의 결과는 고려 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깊은 상처와 변화를 남겼기 때문입니다.
첫째, 승리 뒤에 가려진 막대한 희생과 국력 소모입니다. 홍건적의 무자비한 약탈과 방화로 인해 개경과 주변 지역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수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거나 노비로 끌려갔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농업 기반은 무너지고 국가 재정은 파탄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막대한 국력 소모는 고려의 쇠퇴를 가속화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 승리는, 더 이상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남긴 "피로스의 승리"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전쟁은 고려 사회의 몰락을 가속화했습니다. 홍건적의 침입 과정에서 고려 왕실의 무능함과 중앙 정부의 통제력 상실이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왕이 수도를 버리고 피난을 가는 상황은 백성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왕권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반면, 전쟁의 공을 세운 신흥 무인 세력인 이성계와 최영의 위상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습니다. 그들은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았고, 이들의 존재는 이후 고려 말 정치 판도를 뒤흔드는 강력한 변수가 됩니다. 특히 이성계는 홍건적을 격파하는 과정에서 얻은 군사적 명성을 바탕으로 요동 정벌과 위화도 회군을 통해 고려를 무너뜨리는 주역이 됩니다. 즉, 이 전쟁은 고려의 몰락과 조선 건국의 발판을 동시에 제공한 셈입니다.
셋째, 절망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싹 틔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이 단순히 비극적인 역사로만 남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수도가 함락되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고려인들은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는 불굴의 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공민왕의 피난이라는 비극적 사건은 역설적으로 왕권의 권위를 회복하고 새로운 정치를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공민왕은 피난지 안동에서 백성들의 고통을 직접 보고, 이후 더욱 강력한 개혁 의지를 불태우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고려-홍건적 전쟁은 단순한 외적 침입을 물리친 사건을 넘어, 고려 왕조의 운명을 결정지은 중대한 분수령이었습니다. 이 전쟁의 승리는 고려의 마지막 불꽃을 태웠지만, 동시에 그 불꽃은 쇠락한 고려를 대체할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신진 사대부와 신흥 무인 세력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이 전쟁을 "절망 속에서 피어난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품고 있었던, 역사의 필연적인 과정이었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