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 전쟁: 새로운 천년을 지켜낸 승리의 기록
서론: 거란의 칼날이 고려의 심장을 겨누다
통일신라를 계승하며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북방의 새로운 위협에 직면했습니다. 그 위협은 바로 북방 초원 지대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며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이었습니다.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안정적인 국가 체제를 확립하려던 고려의 앞에, 거란은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다투는 강력한 경쟁 상대로 등장했습니다.
고려와 거란 사이의 긴장은 단순히 영토 분쟁을 넘어선 복잡한 정치적, 외교적 문제였습니다. 거란은 고려를 복속시켜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두려 했고,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북진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거란과 필연적인 충돌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거란의 침입 배경과 세 차례에 걸친 전쟁의 전개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고, 특히 외교의 승리부터 희생과 투쟁, 그리고 최종적인 승리를 이끌어낸 결정적인 전투들을 심도 있게 분석해보고자 합니다.
1. 전쟁의 배경: 북방의 강자, 거란족의 등장과 압박
고려-거란 전쟁의 불씨는 10세기 초, 요하 유역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요나라는 동북아시아의 신흥 강국으로 빠르게 성장하며, 기존의 패권 국가였던 중국의 송나라와 경쟁하는 위치에 올랐습니다. 요나라는 북방 민족에게 늘 위협적인 존재였던 발해를 멸망시키고, 만주와 내몽골 지역을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거란에게 고려는 단순히 이웃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고려는 거란에 의해 멸망한 발해 유민들을 대거 받아들여 국가의 주요 세력으로 통합했습니다. 또한, 고려는 거란의 숙적이었던 송나라와 친선 관계를 유지하며 외교적, 문화적으로 교류했습니다. 거란의 입장에서 이는 자신들의 위협적인 남진 정책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요소였죠. 요나라는 고려를 복속시켜 자신들의 후방을 안정시키고, 송나라와의 대결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고려에게 끊임없는 압박을 가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배경은 10세기 말부터 11세기 초까지 이어지는 세 차례의 침공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2. 제1차 침입: 외교의 승리, 서희의 담판
993년, 요나라의 성종은 80만 대군(실제로는 6만~8만으로 추정)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거란군의 침입 소식에 고려 조정은 크게 동요했고, 많은 신하들이 항복하거나 서경(평양) 이북의 땅을 떼어주는 할지(割地)를 주장했습니다. 이때, 한 장수가 나서서 항복이 아닌 담판을 주장했으니, 그가 바로 탁월한 외교가인 서희였습니다.
서희는 홀로 거란의 지휘관이었던 소손녕과 담판을 벌이는 담대함을 보였습니다. 그는 거란이 고려를 침공한 명분(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려는 것, 고려가 송나라와 교류하는 것)을 역이용했습니다. 서희는 거란에게 "고려라는 국호 자체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서경 이북의 땅은 원래 고려의 영토다"라고 당당하게 주장했습니다. 또한, 그는 "고려가 거란과 교류하지 못하는 것은 압록강 동쪽에 여진족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라며, 여진을 몰아내고 교역로를 확보해준다면 거란과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펼쳤습니다. 소손녕은 서희의 논리 정연한 주장에 설득당했고, 결국 거란군은 싸우지도 않고 철수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서희가 오히려 거란에게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확보한 강동 6주를 고려의 영토로 편입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점입니다.
제1차 침입은 군사적인 충돌보다 외교적 역량의 중요성을 보여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서희의 담판은 무력으로도 얻기 힘든 영토를 외교적 지혜로 확보한, 한국사에서 길이 빛나는 승리였습니다.
3. 제2차 침입: 양규의 분투와 현종의 몽진
서희의 담판 이후, 고려는 거란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강동 6주를 확보한 후 오히려 그곳에 군사적 요새를 강화했고, 송나라와의 교류도 계속 이어나갔습니다. 이에 분노한 거란은 1010년, 황제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2차 침입을 감행했습니다.
이때 고려는 정치적으로도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목종이 강조에 의해 폐위되고 현종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내분이 발생했죠. 거란은 이 틈을 노려 침입했고, 수도 개경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현종은 나주까지 피난(몽진)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거란군은 거대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흥화진의 양규 장군을 비롯한 고려군의 끈질긴 저항에 막혀 진격이 더뎠습니다. 특히 양규는 흥화진을 중심으로 거란군의 보급로를 끊고 후방을 끊임없이 교란하며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거란 황제는 전쟁이 장기화될 것을 우려했고, 결국 고려가 다시 한번 복종하겠다는 약속을 받자 철군을 결정했습니다. 철수하는 거란군을 양규는 끝까지 추격하며 막대한 전과를 올렸지만, 결국 흥화진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비록 수도가 함락되는 위기를 겪었지만, 양규와 같은 수많은 장수들의 투혼 덕분에 고려는 국토를 지킬 수 있었으며, 이는 훗날 거란을 완전히 격퇴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4. 제3차 침입: 귀주대첩, 강감찬의 위대한 승리
2차 침입 후에도 고려는 거란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결국 거란은 마지막 세 번째 침입을 준비했습니다. 1018년, 거란은 소배압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다시 침공했습니다. 이 침략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 고려를 완전히 굴복시키기 위한 최후의 전쟁이었습니다.
고려의 조정은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나섰으니, 그가 바로 고려의 명장 강감찬이었습니다. 당시 70대 노장이었던 강감찬은 상원수(上元帥)로 임명되어 고려군을 총지휘했습니다. 그는 거란군의 진격로를 예측하고, 흥화진 주변의 큰 계곡을 이용하여 미리 물길을 막아두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강감찬은 거란군이 흥화진을 지나자 막아두었던 물을 터뜨려 혼란에 빠뜨렸고, 고려군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맹공을 퍼부었습니다.
거란군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지만, 소배압은 포기하지 않고 수도 개경으로 진격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고려군은 철통같은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고, 결국 거란군은 보급이 끊긴 채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퇴각하는 거란군을 강감찬은 귀주(현 평안북도 귀성)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귀주 벌판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투에서, 강감찬은 고려의 정예 기병을 총동원하여 거란군을 완전히 섬멸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사 3대 대첩 중 하나인 귀주대첩입니다. 이 전투에서 거란군은 거의 전멸했으며, 소배압은 겨우 목숨만 건져 도망쳤습니다.
결론: 승리의 기록이 열어준 천년의 평화
고려-거란 전쟁은 단순히 무력으로만 해결된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이 전쟁의 승리는 외교적 지혜, 민족의 투혼, 그리고 뛰어난 전략적 통찰력이 결합된 결과였습니다.
첫째, 외교의 힘이 군사력을 이겼다는 점입니다. 서희의 담판은 군사적 열세 속에서도 당당하게 자주성을 지키고 오히려 영토를 확장한 위대한 외교적 승리입니다. 이는 강대국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논리와 지혜로 맞선 고려의 자주 의식을 보여주는 증거이며, 외교가 전쟁 못지않게 중요한 국방의 수단임을 일깨워줍니다.
둘째, 패배를 딛고 일어선 민족의 저력입니다. 2차 침입 당시, 수도가 함락되고 왕이 피난을 떠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고려군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양규 장군과 같이 이름 없는 수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바쳐 싸웠고, 그들의 희생은 3차 침입에서 거란을 완전히 꺾을 수 있는 정신적, 군사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셋째, 명장의 전략적 통찰력이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강감찬은 단순히 병력이 많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거란의 강점인 기병의 위력을 약화시키고, 고려의 지형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치밀한 전략을 세웠습니다. 귀주대첩은 이러한 명장의 뛰어난 전략과 고려군의 용맹이 어우러진 완벽한 승리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며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고려는 거란과 화친 관계를 맺고 천리장성을 쌓아 국경 방어를 튼튼히 했습니다. 이로써 고려는 한동안 외세의 침입 없이 평화와 번영을 누리게 됩니다. 문화적으로는 이 시기에 초조대장경을 조판하는 등 불교 문화가 크게 융성했습니다. 고려-거란 전쟁은 고려가 단순한 신흥국이 아니라, 어떤 강대국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 강하고 자주적인 국가임을 증명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자긍심과 함께, 외교와 국방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역사적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