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프 전쟁: 현대 전쟁사의 전환점이 된 100일간의 기록
서론
1991년 1월 17일, 바그다드 상공에서 첫 번째 토마호크 미사일이 날아오르며 세계는 새로운 형태의 전쟁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걸프 전쟁(Gulf War)은 단순히 이라크와 쿠웨이트 간의 지역 분쟁을 넘어서, 냉전 종료 후 새로운 세계 질서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CNN을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된 이 전쟁은 '텔레비전 전쟁'이라고도 불리며, 현대 미디어가 전쟁에 미치는 영향력을 보여주는 첫 번째 사례이기도 했습니다.
이 전쟁이 중요한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첫째, 정밀 유도 무기와 첨단 기술이 대규모로 사용된 최초의 전쟁이었습니다. 둘째, 미국이 유일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셋째,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균형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글에서는 걸프 전쟁의 전개 과정과 그 배경,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영향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본론
1. 전쟁 발발의 배경과 원인
1-1. 이라크-이란 전쟁의 여파
걸프 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1980년부터 1988년까지 지속된 이라크-이란 전쟁의 맥락을 파악해야 합니다. 사담 후세인이 이끄는 이라크는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정권이 바뀐 이란을 침공하며 8년간의 참혹한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 전쟁은 양국에게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안겨주었으며, 특히 이라크는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아랍 산유국들로부터 대규모 차관을 받아야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이라크는 약 800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외채를 안게 되었고, 이 중 상당 부분이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빌린 돈이었습니다. 이라크는 이란과의 전쟁을 아랍 세계를 위한 방어전쟁으로 포장하며 채무 탕감을 요구했지만, 쿠웨이트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이는 후에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는 직접적인 동기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1-2. 석유 가격 분쟁과 경제적 갈등
1988년 이라크-이란 전쟁이 끝난 후, 석유 가격은 급격히 하락했습니다. 이라크는 전후 복구와 외채 상환을 위해 높은 석유 가격이 절실했지만, 쿠웨이트와 UAE는 OPEC 할당량을 초과하여 석유를 생산함으로써 가격 하락을 가속화했습니다. 사담 후세인은 이를 경제 전쟁으로 간주하며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또한 이라크는 쿠웨이트가 국경 지역의 루마일라 유전에서 불법적으로 석유를 채굴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라크의 주장에 따르면, 쿠웨이트는 이라크-이란 전쟁 중 이라크가 방어에 집중하는 동안 국경을 넘나들며 약 24억 달러 상당의 석유를 훔쳤다는 것이었습니다.
1-3. 미국과 이라크의 관계 변화
아이러니하게도 이라크-이란 전쟁 중 미국은 이라크를 지원했습니다. 1979년 이란 혁명과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으로 이란과의 관계가 악화된 미국은 이란 견제를 위해 이라크와 손을 잡았습니다. 미국은 이라크에 농산품과 기술을 제공했고, 심지어 화학무기 원료까지 간접적으로 지원했다는 의혹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이라크가 중동 지역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자, 미국의 시각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이라크가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화학무기를 쿠르드족에게 사용하는 등의 행위는 미국의 우려를 증폭시켰습니다.
2. 쿠웨이트 침공과 국제사회의 반응
2-1. 1990년 8월 2일, 침공의 시작
1990년 8월 2일 새벽, 이라크군은 쿠웨이트 전 지역을 기습 침공했습니다. 약 10만 명의 이라크군과 700여 대의 탱크가 동원된 이 작전은 불과 몇 시간 만에 쿠웨이트 전체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쿠웨이트군은 약 2만 명에 불과했고, 현대적인 무기 체계도 부족했기 때문에 효과적인 저항을 할 수 없었습니다.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이라크의 19번째 주로 병합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점령을 넘어서 완전한 합병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쿠웨이트의 에미르 자베르 알 사바흐와 왕족들은 사우디아라비아로 피신했고, 쿠웨이트 시민들은 이라크군의 억압적인 통치 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2-2. 유엔 안보리의 대응
쿠웨이트 침공 소식이 전해지자 국제사회는 즉각 반응했습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침공 당일인 8월 2일 결의안 660호를 채택하여 이라크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했습니다. 이어서 8월 6일에는 결의안 661호를 통해 이라크에 대한 포괄적인 경제 제재를 결정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냉전이 막 종료된 시점에서 미국과 소련이 이 문제에 대해 협력했다는 것입니다. 소련은 전통적으로 이라크의 우방국이었지만,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신사고 정책 하에서 국제법 준수를 우선시했습니다. 이는 유엔이 실질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2-3. 걸프 국가들의 위기감
쿠웨이트 침공은 걸프 지역 전체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라크군이 국경 지역에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를 받고 극도의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만약 이라크가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침공한다면, 세계 석유 공급의 상당 부분을 통제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파드 국왕은 결국 미군의 파병을 요청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는 사우디아라비아 역사상 처음으로 대규모 외국군을 자국 영토에 받아들이는 결정이었으며, 이슬람 성지를 보유한 국가로서는 매우 어려운 선택이었습니다.
3. 사막의 방패 작전 (Operation Desert Shield)
3-1. 다국적군의 구성
조지 H.W. 부시 대통령은 쿠웨이트 침공에 대해 "이것은 용납될 수 없다(This will not stand)"라고 선언하며 강력한 대응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미국은 즉시 사우디아라비아에 군대를 파병하는 '사막의 방패'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이 작전에는 미국뿐만 아니라 34개국이 참여하는 대규모 다국적군이 구성되었습니다. 주요 참가국으로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 등 서방 선진국들과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시리아 등 아랍 국가들이 포함되었습니다. 심지어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과 싸우던 무자헤딘 세력도 이라크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3-2. 병력 증강과 전쟁 준비
1990년 8월부터 1991년 1월까지 약 5개월간 걸프 지역에는 70만 명에 달하는 다국적군이 집결했습니다. 이 중 54만 명이 미군이었고, 나머지는 연합군이었습니다. 이는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이 해외에 파병한 최대 규모의 군대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미군은 최신 무기 체계들을 대거 배치했습니다. F-117 스텔스 전투기, 토마호크 순항미사일, 패트리어트 미사일 방어 체계, GPS 유도 정밀 폭탄 등이 실전에 배치되었습니다. 이러한 첨단 무기들은 후에 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것이었습니다.
3-3. 외교적 해결 노력
군사적 준비와 함께 외교적 해결 노력도 계속되었습니다. 유엔은 1990년 11월 29일 결의안 678호를 채택하여 이라크에게 1991년 1월 15일까지 쿠웨이트에서 철수할 것을 최후통첩했습니다. 이 결의안은 기한 내에 철수하지 않을 경우 "모든 필요한 수단"을 사용할 수 있다고 명시하여 사실상 무력 사용을 승인했습니다.
소련의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특사를 비롯해 여러 국가들이 중재 노력을 벌였지만,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 철수를 거부했습니다. 대신 이라크는 팔레스타인 문제와 연계하여 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를 조건으로 내걸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4. 사막의 폭풍 작전 (Operation Desert Storm)
4-1. 공중 폭격의 시작
1991년 1월 17일 오전 3시(현지시간), 바그다드에 첫 번째 공격이 가해지면서 걸프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순간을 CNN의 베르나르드 쇼 기자가 실시간으로 중계하면서 전 세계가 전쟁의 시작을 목격했습니다.
첫 번째 공격은 F-117 스텔스 전투기와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에 의해 수행되었습니다. 목표는 이라크의 지휘통제 시설, 통신망, 방공망이었습니다. 특히 바그다드의 정보부 건물과 대통령궁이 정밀 타격을 받았습니다. 이는 '참수 작전(Decapitation Strike)'의 개념을 실제로 적용한 최초의 사례였습니다.
4-2. 정밀 폭격과 기술 전쟁
걸프 전쟁은 '기술 전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습니다. 레이저 유도 폭탄, GPS 유도 폭탄 등 정밀 유도 무기들이 대거 사용되었고, 이는 '외과 수술식 폭격'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냈습니다. 미군은 전체 투하 폭탄의 약 8%에 해당하는 정밀 유도 무기로 전체 피해의 75%를 달성했다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밀 유도 무기의 비율이 언론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낮았고, 상당수의 일반 폭탄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 전쟁들과 비교할 때 민간인 피해는 현저히 줄어들었고, 이는 정밀 타격 능력의 발전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4-3. 스커드 미사일과 이스라엘 위기
이라크는 연합군의 공습에 대응하여 스커드 미사일로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를 공격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은 매우 위험한 도박이었습니다. 사담 후세인의 목적은 이스라엘을 전쟁에 끌어들여 아랍 국가들이 다국적군에서 이탈하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즉각 보복을 준비했지만, 미국의 강력한 설득으로 자제했습니다. 대신 미국은 이스라엘에 패트리어트 미사일 방어 체계를 제공했고, 스커드 미사일 발사대를 찾아 파괴하는 '스커드 헌팅' 작전을 대폭 확대했습니다. 이 위기는 미국의 외교력과 동맹 관리 능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가 되었습니다.
5. 지상전과 전쟁의 종료
5-1. 100시간의 지상전
39일간의 공중 폭격 후, 1991년 2월 24일 지상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지상전은 '좌익 갈고리(Left Hook)' 전술로 불리는 기습적인 우회 기동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미군과 영국군은 사우디아라비아 서부에서 이라크 영토로 깊숙이 침투하여 이라크군의 후방을 차단했습니다.
동시에 미 해병대와 아랍 연합군은 쿠웨이트를 직접 공격했습니다. 이라크군은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못했고, 대부분의 부대가 항복하거나 도주했습니다. 특히 공화국 수비대와 같은 정예 부대들도 연합군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서 무력화되었습니다.
5-2. 쿠웨이트 해방과 파괴
지상전 시작 4일 만인 2월 28일, 쿠웨이트시가 해방되었습니다. 하지만 쿠웨이트는 이라크군의 파괴 행위로 인해 처참한 상태였습니다. 이라크군은 철수하면서 600여 개의 유정에 불을 질렀고, 이로 인한 환경 재앙은 수개월간 지속되었습니다.
또한 이라크군은 쿠웨이트의 주요 인프라를 파괴했습니다. 발전소, 정수장, 병원, 학교 등이 폭파되었고, 귀중한 문화재와 예술품들이 약탈당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제네바 협약 위반으로 간주되었고, 후에 전쟁 범죄로 규정되었습니다.
5-3. 전쟁의 조기 종료
지상전이 시작된 지 정확히 100시간 만인 1991년 2월 28일 오전 8시, 조지 부시 대통령은 전쟁 종료를 선언했습니다. 이라크가 유엔 결의안 수용과 쿠웨이트 철수를 약속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군사 전문가들은 이 결정이 성급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의 상당 부분이 무사히 빠져나갔고, 사담 후세인 정권도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후에 남부 시아파 봉기와 북부 쿠르드 봉기가 이라크군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면서, 전쟁 조기 종료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습니다.
6. 전쟁의 결과와 영향
6-1. 인명 피해와 경제적 손실
걸프 전쟁의 인명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다국적군 측은 전사자 279명, 부상자 776명이었고, 이 중 미군은 전사 148명, 부상 467명이었습니다. 반면 이라크군의 피해는 정확히 집계되지 않았지만, 추정치로는 2만-3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경제적 손실은 훨씬 컸습니다. 미국의 전쟁 비용은 약 610억 달러였지만, 이 중 540억 달러를 동맹국들이 분담했습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가 대부분을 부담했고, 일본과 독일도 상당한 기여금을 제공했습니다. 이라크의 경우 전쟁과 경제 제재로 인한 손실이 수천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6-2. 중동 지역 질서의 변화
걸프 전쟁은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균형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라크는 지역 강국의 지위를 잃었고, 대신 이란이 상대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미군이 사우디아라비아와 걸프 지역에 지속적으로 주둔하게 되면서, 미국의 중동 지역 영향력이 크게 강화되었습니다.
이는 후에 알카에다와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반미 감정을 자극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오사마 빈 라덴은 이슬람 성지가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미군이 주둔하는 것을 강력히 비판했고, 이는 9/11 테러의 동기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6-3. 군사 기술의 혁명
걸프 전쟁은 군사 기술 발전에 혁명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정밀 유도 무기, 스텔스 기술, 위성 통신, GPS 등의 효과가 입증되면서 각국은 군사 현대화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특히 '정보화 전쟁'의 개념이 확산되면서, 정보 수집과 처리 능력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인식되었습니다.
이는 군사 혁신뿐만 아니라 방위산업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정밀 유도 무기와 첨단 전자장비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고, 이는 미국 방위산업체들에게 큰 기회가 되었습니다.
결론
걸프 전쟁은 명확한 승자와 패자가 있는 전쟁이었습니다. 군사적으로는 다국적군, 특히 미국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40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최소한의 인명 피해로 전쟁 목표를 달성한 것은 현대 전쟁사에서 보기 드문 성과였습니다. 이라크는 군사력의 상당 부분을 잃었고, 국제적 고립에 빠졌으며, 경제 제재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승리는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사담 후세인 정권이 유지되었고, 이후 12년간 계속된 경제 제재와 무력 충돌은 결국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걸프 전쟁으로 인한 중동 지역의 불안정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걸프 전쟁의 가장 중요한 유산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미국이 유일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는 점입니다. 소련의 붕괴와 함께 미국은 군사적으로 도전받지 않는 절대적 우위를 확보했고, 이는 이후 30여 년간 국제 질서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둘째, 전쟁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했다는 점입니다. 정밀 타격, 정보전, 실시간 미디어 중계 등은 전쟁을 '스마트한' 것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더욱 복잡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는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셋째, 국제 협력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었다는 점입니다. 34개국이 참여한 다국적군의 성공은 국제법에 기반한 집단 안보의 실현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일치할 때만 가능하다는 한계도 드러났습니다.
현재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동의 지속적인 불안정, 그리고 미중 패권 경쟁은 모두 걸프 전쟁이 만들어낸 세계 질서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걸프 전쟁은 단순히 30여 년 전의 지역 분쟁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걸프 전쟁의 교훈은 중요한 참고점이 될 것입니다. 특히 군사력의 한계, 정치적 해결의 중요성, 그리고 국제 협력의 필요성은 여전히 유효한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