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완다 학살: 100일간의 지옥과 국제사회의 침묵
서론
1994년 4월 6일부터 7월 중순까지 단 100일 동안 르완다에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의 집단학살이 벌어졌습니다. 약 80만 명에서 100만 명의 투치족과 온건 후투족이 학살당한 이 비극은 홀로코스트 이후 가장 참혹한 집단학살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하루 평균 8,000명이 죽어갔던 이 100일간의 지옥에서 국제사회는 방관자에 머물렀고, 이는 '인도주의적 개입'의 실패를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르완다 학살이 더욱 충격적인 이유는 그 잔혹함과 체계성에 있습니다. 마체테(큰 칼)와 곤봉으로 무장한 후투족 민병대들이 이웃, 친구, 심지어 가족까지 살해했습니다. 교회, 학교, 병원 등 피난처로 여겨졌던 곳들이 학살터가 되었고, 라디오 방송은 증오를 부추기며 살인을 선동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투치족과 후투족 간의 역사적 갈등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식민지 시대의 유산이 어떻게 이 비극을 촉발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또한 100일간의 학살 과정과 국제사회의 무력한 대응,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영향에 대해 자세히 분석해보겠습니다.

1. 투치족과 후투족: 갈등의 뿌리
1-1. 식민지 이전의 르완다 사회
르완다 학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투치족과 후투족의 역사적 관계를 파악해야 합니다. 식민지 이전 르완다에서 투치족(약 15%)과 후투족(약 84%), 그리고 소수의 트와족(약 1%)은 같은 언어(키냐르완다)를 사용하고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하나의 민족이었습니다.
1-2. 독일과 벨기에 식민지 시대의 분할 정책
1897년 독일이 르완다를 식민지화한 후, 그리고 1차 대전 후 벨기에가 위임통치를 맡으면서 상황이 변했습니다. 유럽 식민지 정부들은 '분할해서 통치하라(Divide and Rule)' 정책을 채택했고, 투치족을 '우월한 민족'으로, 후투족을 '열등한 민족'으로 구분하기 시작했습니다.
1-3. 신분증 도입과 종족 구분의 고착화
1933년 벨기에 식민지 정부는 모든 르완다인에게 종족을 명시한 신분증 휴대를 의무화했습니다. 이 신분증에는 '투치', '후투', '트와' 중 하나가 명기되었고, 이는 부모로부터 자동으로 상속되었습니다. 이 제도는 유동적이었던 종족 정체성을 완전히 고정시켰고, 후에 학살자들이 희생자를 식별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2. 독립과 후투족 정권의 등장
2-1. 1959년 후투족 혁명
1959년 11월, 투치족 족장이 후투족에게 폭행당하는 사건을 계기로 대규모 후투족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이 '후투족 혁명'으로 수백 명의 투치족이 살해되었고, 15만 명이 주변국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2-2. 카이반다 정권과 투치족 탄압
카이반다 정권(1962-1973)은 '후투족 공화국'을 표방하며 투치족에 대한 체계적인 차별을 시행했습니다. 투치족은 공직과 교육기관에서 배제되었고, 정기적인 학살과 탄압이 자행되었습니다.
2-3. 하비야리마나의 쿠데타와 권위주의 체제
1973년 쥐베날 하비야리마나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하비야리마나는 투치족에 대한 직접적인 탄압은 줄였지만, 여전히 투치족을 정치권에서 배제했습니다. 그는 '개발과 평화'를 내세우며 20년간 독재 체제를 유지했습니다.
3. 르완다 애국전선의 침공과 내전
3-1. 르완다 애국전선(RPF)의 결성
1980년대 말 우간다에 거주하던 투치족 난민들이 '르완다 애국전선(RPF)'을 결성했습니다. RPF는 폴 카가메를 비롯한 우간다군 출신 투치족 장교들이 주도했으며, 무력을 통한 조국 귀환을 목표로 했습니다.
3-2. 다당제 전환과 정치적 혼란
1992년부터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은 '1000개 언덕의 라디오(RTLM)'를 통해 반투치족 선전을 본격화했습니다. 이 방송은 투치족을 '바퀴벌레', '뱀' 등으로 비하하며 증오를 부추겼고, 후에 학살을 조직하는 핵심 도구가 되었습니다.
3-3. 아루샤 평화협정의 좌절
1993년 8월 탄자니아 아루샤에서 르완다 정부와 RPF 간에 아루샤 평화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유엔은 협정 이행을 감시하기 위해 '유엔 르완다 지원단(UNAMIR)'을 파견했지만, 2,500명에 불과한 평화유지군으로는 악화되는 상황을 통제하기 어려웠습니다.
4. 학살의 시작: 하비야리마나 대통령 암살
4-1. 1994년 4월 6일의 비행기 격추
1994년 4월 6일 저녁, 아루샤 협정 후속 협상에서 돌아오던 하비야리마나 대통령과 부룬디 은타리야미라 대통령을 태운 비행기가 키갈리 공항 상공에서 미사일에 격추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100일간의 대학살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4-2. 학살 기계의 가동
비행기 격추 직후부터 미리 준비된 학살 계획이 실행되었습니다. '인테라함웨(Interahamwe)'라는 후투족 민병대가 주요 도로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투치족 색출에 나섰습니다. 라디오 방송은 24시간 살인을 선동했고, "키갈리에서 바퀴벌레들을 청소하라"는 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4-3. 가족과 이웃의 배신
르완다 학살의 가장 충격적인 측면은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일상적 관계였습니다. 이웃, 친구, 직장 동료, 심지어 가족까지 서로를 살해했습니다.
5. 100일간의 지옥: 학살의 전개 과정
학살은 수도 키갈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학교와 교회가 주요 학살터가 되었고, 여성에 대한 체계적인 강간과 살해도 중요한 무기로 사용되었습니다. 강간은 단순한 성적 폭력이 아니라 투치족 공동체를 파괴하려는 체계적인 전략이었습니다.
6. 국제사회의 무관심과 방관
학살이 시작되자 유엔안보리는 오히려 평화유지군을 철수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4월 21일 유엔은 UNAMIR 병력을 2,500명에서 270명으로 대폭 축소했습니다. 당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주요국들은 아프리카 개입에 소극적이었습니다.
클린턴 행정부는 르완다 상황을 '집단학살(genocide)'로 규정하기를 거부했고, '집단학살적 행위(acts of genocide)'라는 애매한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프랑스 역시 애매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7. RPF의 승리와 학살의 종료
학살이 진행되는 동안 RPF는 군사 작전을 지속했습니다. 7월 4일 RPF가 키갈리를 점령하면서 학살 정권이 붕괴되었고, 7월 18일 RPF는 완전한 군사적 승리를 선언했습니다. 학살은 끝났지만, 그때까지 이미 80만-100만 명이 희생된 후였습니다.
8. 학살 이후의 르완다: 재건과 정의
RPF 정부는 집권 후 '하나의 르완다(One Rwanda)' 정책을 추진하며 종족 구분을 폐지했습니다. 가차카(Gacaca) 전통 법정을 통해 지역 차원의 진실 규명과 화해 과정을 진행했고, 경제 재건에도 놀라운 성과를 이룩했습니다. 유엔은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ICTR)를 설치해 주요 가해자들을 처벌했습니다.
결론
르완다 학살에서 군사적 승자는 명확히 르완다 애국전선(RPF)이었지만, 100만 명의 생명, 파괴된 사회, 그리고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은 어떤 승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르완다 학살에는 승자가 없었습니다.
"르완다 학살은 '절대 다시는(Never Again)'이라는 홀로코스트의 교훈이 얼마나 공허한 구호에 불과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국제사회는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는 '몰랐다'고 변명했지만, 르완다에서는 실시간으로 학살이 중계되는 상황에서도 방관했습니다."
이러한 무관심의 뿌리에는 아프리카에 대한 서구의 편견, 소말리아 개입 실패의 후유증, 그리고 냉전 종료 후 아프리카의 전략적 가치가 떨어졌다는 판단 등 여러 요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현실주의적' 계산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르완다 학살의 충격으로 '보호 책임(Responsibility to Protect)' 개념이 발전했고, 국제형사재판소가 설립되었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여전히 이 교훈들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르완다의 비극이 진정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현재 진행 중인 인도주의적 위기들에 대한 우리의 대응을 성찰하고, '절대 다시는'이라는 다짐을 실천으로 옮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