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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 제너럴 셔먼호 사건

by edge79 2025.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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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너럴 셔먼호 사건: 조선의 쇄국정책과 서구 열강의 충돌

1866년 8월, 대동강에서 일어난 한 척의 미국 상선 침몰 사건은 조선과 미국 관계사에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 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단순한 해상 충돌을 넘어서 동서양 문명의 충돌, 그리고 조선의 쇄국정책과 서구 열강의 통상 요구가 정면으로 맞부딪힌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통상을 명목으로 대동강에 침입하여 약탈행위를 일삼자, 분노한 평양 주민들이 이 배를 불태워 침몰시킨 이 사건은 후에 신미양요의 직접적인 빌미가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배경과 전개 과정, 그리고 이 사건이 조선 후기 대외관계에 미친 파장에 대해 상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19세기 중반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19세기 중반 동아시아의 급격한 정세 변화를 파악해야 합니다. 1840년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서구 열강들이 동아시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고, 전통적인 중화질서는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었습니다.

중국은 아편전쟁과 애로호 전쟁을 거치면서 연이어 굴욕적인 불평등조약을 체결해야 했습니다. 1842년 난징조약, 1858년 톈진조약 등을 통해 중국은 여러 항구를 개방하고 치외법권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일본 역시 1854년 페리 제독의 함포외교로 개국을 강요당했고, 1858년 안세이 조약을 통해 개국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만이 여전히 굳건한 쇄국정책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대원군이 집권한 1860년대는 조선의 쇄국정책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척화비를 전국에 세울 정도로 강력한 반서구 정책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2. 미국의 동아시아 진출과 조선에 대한 관심

19세기 중반 미국은 서부 개척을 완료하고 태평양으로 진출하려는 야심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1845년 텍사스 합병, 1846년 오리건 획득, 1848년 캘리포니아 합병을 통해 태평양 연안을 확보한 미국은 이제 아시아 시장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에서 조선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한 조선은 동아시아 해상교통로의 요충지였으며, 풍부한 천연자원과 잠재적 시장으로서의 가치도 높았습니다. 특히 태평양을 횡단하는 증기선들에게 조선의 항구들은 중요한 보급기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중국과 일본이 연이어 개국한 상황에서 조선만이 여전히 문을 닫고 있다는 것은 미국 상인들에게는 미개척 시장으로서의 매력을 의미했습니다. 미국 정부와 상인들은 조선과의 통상 개시를 통해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얻고자 했습니다.

3. 제너럴 셔먼호의 정체와 원정 목적

제너럴 셔먼호는 원래 미국의 증기선이었으나, 1866년 당시에는 중국 톈진에 거주하는 미국 상인들이 임대한 상선이었습니다. 이 배에는 선장을 비롯해 총 24명이 탑승하고 있었는데, 그 구성은 매우 다양했습니다. 미국인, 중국인, 말레이시아인이 뒤섞여 있었고, 심지어 웨일스 출신의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토머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제너럴 셔먼호의 공식적인 목적은 통상이었습니다. 이들은 조선과 무역협정을 체결하고 상업적 관계를 시작하고자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단순한 상업적 목적을 넘어서는 복합적인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선교 활동, 정보 수집, 그리고 향후 본격적인 개국 교섭을 위한 정찰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들이 조선의 쇄국정책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력을 동반한 채 접근했다는 것입니다. 제너럴 셔먼호는 대포와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이는 평화적인 통상 목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4. 대동강 침입과 조선 관리들과의 첫 충돌

1866년 8월 9일,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 하구에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먼저 철산 앞바다에서 조선의 관리들과 접촉을 시도했습니다. 조선 측에서는 철산부사와 지역 관리들이 나서서 이들의 의도를 파악하려 했습니다.

조선 관리들은 이들에게 즉시 돌아갈 것을 요구했습니다. 조선의 쇄국정책상 외국 상선의 영내 진입은 절대 허용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너럴 셔먼호 측은 이러한 요구를 무시하고 오히려 평양까지 올라가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첫 번째 무력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조선 관리들이 강제로 배를 돌려보내려 하자, 셔먼호 승무원들이 발포를 시작한 것입니다. 이 총격으로 조선 측에서 여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는 사태를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갔습니다.

5. 평양까지의 강행 진입과 약탈 행위

조선 관리들의 제지를 무력으로 뚫고 지나간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 근처까지 도달했습니다. 이는 조선의 주권을 명백히 침해하는 행위였으며, 평양 지역 주민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들이 단순한 통상 목적을 넘어서 약탈 행위를 자행했다는 것입니다. 셔먼호 승무원들은 강변에 상륙해 민가를 습격하고 식량과 재물을 약탈했습니다. 또한 조선 관리나 주민들을 강제로 배에 끌고 가는 납치 행위도 벌였습니다.

특히 이들은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가 파견한 협상 담당자들을 무력으로 위협하며 인질로 잡았습니다. 이는 외교적 관례를 무시하는 행위로, 조선 측의 분노를 극도로 자극했습니다. 평양 주민들은 이제 이들을 단순한 상인이 아닌 침략자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6. 조선 관군과 평양 주민들의 반격

제너럴 셔먼호의 약탈 행위가 계속되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본격적인 무력 대응을 결정했습니다. 관군이 동원되었고, 평양 지역 주민들도 자발적으로 항거에 나섰습니다. 이는 조선 역사상 외침에 맞선 관민 합동 저항의 대표적 사례 중 하나였습니다.

조선 측의 반격은 체계적이고 치밀했습니다. 먼저 강의 양안에서 조총과 활을 이용한 집중 공격을 가했습니다. 비록 제너럴 셔먼호가 서구식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압도적인 수적 우세와 지형상의 이점을 활용한 조선 측의 공격을 막아내기는 어려웠습니다.

특히 평양 주민들의 저항 의지는 대단했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관군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고향을 침범하고 약탈을 일삼는 침입자들에 대한 분노로 스스로 무기를 들었습니다. 농민들까지 농기구를 무기 삼아 저항에 나섰을 정도였습니다.

7. 제너럴 셔먼호의 최후와 전원 사망

며칠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제너럴 셔먼호는 절망적인 상황에 몰렸습니다. 승무원들의 사상자가 늘어났고, 식량과 탄약도 떨어져갔습니다. 더욱이 대동강의 수위가 낮아지면서 배가 모래톱에 좌초되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은 평양 주민들이 화공을 시도하면서 왔습니다. 1866년 8월 24일, 주민들은 불을 댕긴 나무와 짚단을 배에 던져 넣었고, 곧 제너럴 셔먼호는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승무원들은 강물에 뛰어들어 도망치려 했지만, 분노한 주민들에 의해 모두 사살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너럴 셔먼호의 24명 승무원은 전원 사망했고, 배는 완전히 소실되었습니다. 평양 주민들은 이 사건을 조선의 주권과 자주성을 지킨 자랑스러운 승리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곧 더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8. 미국의 대응과 신미양요로의 발전

제너럴 셔먼호 사건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자, 미국 정부와 언론은 크게 반발했습니다. 미국 측은 이를 '야만적인 조선인들이 평화로운 상선을 공격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조선에 대한 응징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은 먼저 외교적 해결을 시도했습니다. 1867년과 1868년 두 차례에 걸쳐 군함을 파견해 사건의 진상 규명과 배상을 요구했지만, 조선은 이를 모두 거부했습니다. 조선 측에서는 제너럴 셔먼호가 먼저 조선의 영토를 침범하고 약탈을 자행했으므로 정당방위였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결국 미국은 무력을 통한 해결을 결정했습니다. 1871년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대규모 함대가 조선을 침공했고, 이것이 바로 신미양요입니다. 강화도를 점령하고 조선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신미양요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직접적인 결과였습니다.

결론: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남긴 교훈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되돌아보면서, 이 사건이 단순한 우발적 충돌이 아닌 필연적인 문명 충돌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19세기 중반 서구 열강의 팽창주의와 조선의 쇄국정책이 정면으로 맞부딪힌 결과였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사건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평양 주민들의 자발적이고 용감한 저항 정신입니다. 이들은 관군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침입자들에 맞섰습니다. 자신들의 고향을 지키려는 의지, 외침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자주정신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특히 신분을 가리지 않고 온 마을이 하나가 되어 저항한 모습은 우리 민족의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사건이 보여주는 한계와 아쉬움도 분명합니다. 조선의 쇄국정책은 나름의 합리성이 있었지만,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한 이해 부족과 경직된 대응 방식은 결국 더 큰 시련을 불러왔습니다. 만약 조선이 좀 더 유연하고 전략적인 외교정책을 펼쳤다면,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같은 비극적 충돌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특히 아쉬운 것은 조선 측의 정당한 자위 행위가 국제적으로는 '야만적 행위'로 매도되었다는 점입니다. 당시의 국제법과 외교 관례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무력 충돌로만 해결하려 했던 것은 외교적 미숙함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신미양요라는 더 큰 군사적 위기로 이어졌고, 결국 조선 개국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주는 교훈은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급변하는 국제정세에서 자주성을 지키면서도 현실적이고 유연한 외교정책을 펼치는 것의 중요성, 그리고 무력 충돌보다는 외교적 해결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는 지혜의 필요성을 일깨워줍니다. 동시에 평양 주민들이 보여준 자주정신과 조국 수호 의지는 오늘날 우리가 계승해야 할 소중한 정신적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때로 비극적 충돌을 통해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어냅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역시 그런 비극적 전환점 중 하나였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급변하는 시대에 어떻게 자주성을 지키면서도 현실적 대응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의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조선의 쇄국정책과 서구 열강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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