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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전쟁 ( Wars of Alexander the Great)

by edge79 2025.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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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전쟁: 제국을 넘어선 위대한 여정

고대 세계의 지도를 바꾼 위대한 정복자의 발자취

 

 

이수스 전쟁(알렉산더 대왕과 페르시아 제국 다리우스 3세의 전쟁_모자이크 벽화_출처 구글

 

 

 

1. 위대한 정복자의 탄생과 준비

알렉산드로스 대왕(기원전 356-323년)은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와 에페이로스의 공주 올림피아스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리스 폴리스들을 통합하고 마케도니아를 강력한 군사 국가로 만든 위대한 군주였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어린 시절부터 군사 훈련을 받았으며,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철학, 수사학, 과학 등 다양한 학문을 배우며 지성과 교양을 겸비했습니다. 이러한 교육은 그가 단순한 전사가 아닌, 문명과 문화를 이해하고 융합하는 통치자로 성장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기원전 336년, 필리포스 2세가 암살당하자 20세의 젊은 알렉산드로스는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즉시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내부의 혼란을 진압하고, 아버지의 숙원이자 그리스 연합의 목표였던 페르시아 제국 원정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잘 훈련된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밀집 장창 보병대)와 기병대를 기반으로 한 강력한 군대를 이끌었습니다.

2. 페르시아 제국 정복: 동방으로의 진격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 원정은 기원전 334년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약 4만 8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아시아 땅을 밟았습니다. 그의 목표는 단순히 페르시아를 정복하는 것을 넘어, 동서양 문명을 융합하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가. 그라니코스 전투 (기원전 334년)

소아시아에 상륙한 알렉산드로스는 그라니코스 강에서 페르시아군과 첫 대규모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는 직접 선두에 서서 강을 건너 돌격하는 과감한 전술을 구사하여 페르시아군을 격파했습니다. 이 승리로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은 해방되었고,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정복의 교두보를 확보했습니다.

나. 이소스 전투 (기원전 333년)

소아시아를 거쳐 시리아로 진격하던 알렉산산드로스는 이소스에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가 직접 이끄는 대군과 맞닥뜨렸습니다. 페르시아군은 수적으로 압도적이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좁은 지형을 이용하여 페르시아군의 병력 우위를 무력화시켰습니다. 그는 기병대를 이끌고 다리우스 3세의 본진을 직접 공격하여 다리우스를 도주하게 만들었고, 페르시아군을 궤멸시켰습니다. 이소스 전투의 승리로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서부 영토를 장악하고, 다리우스 3세의 가족을 포로로 잡는 등 엄청난 전리품을 얻었습니다.

다. 티레 공성전과 이집트 정복 (기원전 332년)

이소스 전투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페니키아의 강력한 해상 도시 티레를 공략했습니다. 티레는 견고한 방어 시설을 갖춘 섬 도시였으나, 알렉산드로스는 7개월에 걸친 끈질긴 공성전 끝에 육지와 섬을 잇는 제방을 건설하여 도시를 함락시켰습니다. 이후 그는 이집트로 진격하여 아무런 저항 없이 이집트를 정복하고, 나일강 삼각주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이집트에서 그는 신탁을 받아 자신이 아몬 신의 아들임을 선포하며 신성한 권위를 확보했습니다.

라. 가우가멜라 전투 (기원전 331년)

이집트에서 돌아온 알렉산드로스는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하여 가우가멜라 평원에서 다리우스 3세가 다시 한번 소집한 페르시아 제국의 최정예 대군과 마지막 대결을 펼쳤습니다. 페르시아군은 전차와 코끼리 부대까지 동원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뛰어난 전술과 기동력으로 페르시아군의 중앙을 돌파하고 다리우스 3세의 본진을 위협했습니다. 다리우스 3세는 또다시 도주했고, 페르시아군은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가우가멜라 전투의 승리는 페르시아 제국의 실질적인 멸망을 의미했습니다.

3. 제국의 완성: 동방으로, 동방으로

가우가멜라 전투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인 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 등을 차례로 점령했습니다. 그는 페르세폴리스의 궁전을 불태우며 페르시아 전쟁의 복수를 완수했습니다. 다리우스 3세는 도주하던 중 자신의 부하들에게 암살당했고,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 3세의 시신을 정중히 수습하며 자신을 페르시아 제국의 정당한 후계자로 선포했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한 알렉산드로스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동쪽으로 진격했습니다. 그는 중앙아시아의 소그디아나와 박트리아 지역을 정복하며 현지 부족들의 끈질긴 저항에 맞섰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현지 귀족의 딸인 록사네와 결혼하여 동서양 융합 정책의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가. 인도 원정 (기원전 327-325년)

알렉산드로스의 야망은 인도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그는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도로 진격하여 히다스페스 강(젤룸 강)에서 강력한 코끼리 부대를 보유한 포루스 왕과 격전을 벌였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뛰어난 전술로 포루스 왕에게 승리했지만, 포루스의 용맹함에 감탄하여 그를 자신의 총독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원정에 지친 병사들은 더 이상 동쪽으로 진격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병사들의 뜻을 존중하여 회군을 결정했습니다. 그는 인더스 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해상 탐험대를 조직하여 페르시아만으로 보냈고, 자신은 육로를 통해 페르시아로 돌아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게드로시아 사막을 통과하며 많은 병력을 잃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4. 제국의 통치와 헬레니즘 문명의 시작

알렉산드로스는 정복한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시도했습니다.

가. 동서양 융합 정책

  • 그는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인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인 등 현지인들을 제국 행정과 군대에 등용했습니다. 또한, 수많은 병사들에게 페르시아 여성들과 결혼하도록 장려하는 대규모 합동 결혼식을 주최하는 등 동서양의 인종과 문화를 융합하려 노력했습니다. 이는 제국의 안정과 통합을 위한 장기적인 비전이었습니다.

나. 도시 건설과 문화 전파

  • 알렉산드로스는 정복한 지역 곳곳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들을 건설했습니다. 이 도시들은 그리스 문화를 전파하고 동서양 교류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특히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세계의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했습니다.

다. 헬레니즘 문명의 토대

  •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전쟁은 그리스 문화를 동방으로 확산시키고, 동방의 문화와 융합하여 '헬레니즘 문명'이라는 새로운 문명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헬레니즘 문명은 그리스의 합리주의와 동방의 신비주의가 결합된 형태로, 이후 로마 제국을 거쳐 서양 문명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5. 알렉산드로스의 죽음과 제국의 분열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습니다. 그의 나이 불과 32세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제국을 큰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후계자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장군들(디아도코이)은 제국의 영토를 놓고 치열한 내전을 벌였습니다. 결국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의 셀레우코스 왕조,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조 등 여러 헬레니즘 왕국으로 분열되었습니다.

6. 결론: 영원히 기억될 위대한 유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전쟁은 고대 세계의 지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는 페르시아라는 거대한 제국을 무너뜨리고, 그리스 문화를 동방 세계로 확산시켰으며, 동서양 문명의 교류와 융합을 촉진하여 헬레니즘 시대를 열었습니다. 비록 그의 제국은 오래가지 못하고 분열되었지만, 그가 남긴 문화적, 정치적 유산은 수백 년간 지속되었으며, 로마 제국과 이후의 서양 문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열고 문명의 방향을 제시한 선구자였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리더십, 야망, 그리고 문화적 융합의 중요성을 논할 때 끊임없이 소환되는 위대한 역사적 인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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